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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돋는 이야기 a creepy story/미제사건 모음 a collection of unsolved cases

한국 미제사건 모음 다섯번 째

by 형징 2023.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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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미국인 학원강사 피살사건

  1988년 12월 2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외국인의 피살사건으로 용의자는 특정되었지만 범죄자 인도조약이 맺어지지 않던 시절이라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아 미제사건이 되어버린 사건이다. 1988년은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행사인 19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해였다. 올림픽을 계기로 외국인들이 들어왔고 한편으로 한국에서는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어학습붐이 일었다. 이런 이유들로 외국인 영어강사들을 채용하는 영어학원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고 많은 외국인들이 원어민으로 영어학원에 채용되어 일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인 캐롤린 조이스 아벨 또한 한국으로 들어온 영어 강사 중 한명이었다. 당시 26살이던 그녀는 해외를 다니는 것을 즐겨하는 모험심이 많은 여성이었고, 대학 졸업 후 여러 국가를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여행을 했으며 네팔에서 처음 영어강사로 일한 뒤 1987년에는 일본에서 영어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이때 남자친구인 일본인 남자친구 토모유키를 만났다. 그녀는 일본의 옆나라인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 한국에서 유명한 모 영어학원이 외국어 강사를 모집하자 일본에서의 경력을 기반으로 모집에 응시해 채용이 확정되어 1988년 10월에 입국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잠실 주공 5단지 516동 1504호에 전세로 입주하여 나름 한국에서의 생활에 만족하면서 지내던 중에
1988년 12월 20일, 수업이 있었던 캐롤린은 학원에 출근하지 않았고 캐롤린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된 동료 외국인 강사들과 한국인 학생 몇이 송파구에 있던 그녀의 아파트로 찾아가게 되었다. 이상하게 문이 잠겨져 있지 않았고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한국 학생들이 거실을 살피고 동료 외국인 강사 중 한 명인 캐시 패트릭이 방에 들어가 그녀를 찾았는데 방 안에서 그녀가 살해된 채로 있는 것을 발견한 캐시는 한국 학생에게 신고를 부탁해 학생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게 되었다.
경찰이 확인한 캐롤린의 시신 상태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서 공격을 받은걸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는지 그녀의 시신에선 다수의 방어흔이 발견되었으며 온몸 30여 군데가 칼로 난자당해 있었다. 결정적인 사인은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까지 이어지는 목을 그은 상처였다.

피해자 좌측


경찰의 조사로 그녀가 전날인 12월 19일 평소대로 출근해 밤 10시 30분경에 퇴근해 지하철을 타고 자신의 집인 송파구 아파트로 들어간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 그녀는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지 않았고 동료 외국인 강사들과 한국 학생들이 찾아간 때는 12월 20일 낮 12시 30분쯤이었다. 즉 학원에서 퇴근해 집에 찾아간 이들이 발견해서 신고한 14시간 사이에 그녀가 살해된 걸로 보였다. 캐롤린의 동료 외국인 강사들은 그녀가 살해된 것이 혹 외국인을 노린 범죄가 아닌지 의심했다. 그러나 한국 경찰은 외국인을 노린 범죄가 아니라 캐롤린의 주변 인물, 특히 친하게 지낸 남성이 살해한 치정살인이 아닌지 의심했다. 그 이유인즉 그녀의 아파트가 열려있었긴 했으나 누군가가 억지로 문을 열었다거나 강제로 침입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또한 캐롤린의 집 거실 탁자에 커피잔 두 잔이 놓여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래서 외국인을 노린 범죄보다는 면식범에 의한 살인을 의심한 것이다.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캐롤린의 일본인 남자친구인 토모유키였다.
토모유키는 11월경에 한국에 있던 캐롤린에게 찾아와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고 한다. 캐롤린은 그 자리에서 확답을 주지 않고 다음 달에 답을 하겠다고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고, 토모유키는 다시 다음 달인 12월에 들어와서 캐롤린에게 확답을 들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한국경찰은 청혼을 거절당한 토모유키가 범인이 아닐까 의심해 봤으나 출입국기록의 조회결과 토모유키는 11월 이후 한국에 다시 입국한 사실이 없었고 캐롤린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한 토모유키를 조사해 그의 알리바이를 확인한 결과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알리바이가 확인되어서 혐의가 풀리게 되었다.
미국인이 살해된 사건이었던지라 서울특별시 경찰국은 결국 주한미군에 공조수사를 의뢰했고 이에 주한 미군은 소속 수사관인 존 보트라이트를 파견해 사건 수사에 참여시키게 된다. 보트라이트 또한 한국 경찰과 마찬가지로 사건의 범인이 캐롤린과 면식이 있는 지인 중에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특히 보트라이트는 캐롤린의 지인들 중 캐롤린의 집에 가서 처음으로 시신을 발견했던 캐시 패트릭과 샌드라 에임즈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트라이트가 의심을 시작한 때에는 이미 캐시는 한국을 떠나서 자신이 전에 다니던 워싱턴 주립대학교에 복학한 상태였고 샌드라는 한국에 남아있던 상태라 보트라이트는 샌드라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보트라이트가 샌드라에게 "당신이 캐롤린을 죽였습니까?"라고 묻자 샌드라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죽이지 않았다고 답변했고, 보트라이트는 샌드라를 강하게 의심해 그녀에게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받도록 했다. 물론 거짓말 탐지기는 증거로 채택할 순 없지만 그녀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중요한 정황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샌드라는 거짓말 탐지기 조사 중 캐롤린을 살해한 흉기에 대해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모른다고 했으나 그것은 거짓반응으로 나타났다. 결과를 받아보고 확신이 든 보트라이트는 샌드라에게 같은 질문을 다시 던졌고 거짓말 탐지기의 결과를 들은 샌드라는 결국 사건의 실상을 자백하게 되었다. 샌드라의 자백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샌드라는 캐롤린을 살해한 범인은 다름 아닌 그녀의 동료이자 친한 친구 사이였던 캐시 패트릭이라고 털어놓았다.
사실 캐시는 레즈비언이었는데 샌드라를 포함한 소수의 동료들은 캐시의 성적 지향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위해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살해된 캐롤린은 캐시의 성적 지향을 알지 못했다.
캐롤린이 S학원의 강사로 온 뒤, 캐시는 캐롤린에게 반해 그녀를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캐롤린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려는 결심을 했지만, 그녀의 성적지향을 알고 있던 소수의 지인들은 이를 말렸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캐롤린은 결혼을 이야기하는 남자친구까지 있었던 이성애자였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란 만류를 받았던 것. 그러나 결국 캐시는 12월 19일 밤에 캐롤린의 집으로 찾아가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샌드라에 의하면 20일 새벽, 캐시가 자신에게 찾아와 자신이 캐롤린을 죽인 것 같다고 털어놓았고 놀란 샌드라는 캐시와 함께 한밤중에 몰래 캐롤린의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샌드라가 가봤을 때는 캐롤린의 몸이 아직 따뜻해서 죽지 않은 걸로 판단해 샌드라 본인이 직접 캐롤린의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에까지 목을 그어 확인 살해를 했다고 시인했다. 샌드라는 이후 둘은 캐롤린의 집을 어지럽혀서 강도가 들어와 살해한 것처럼 위장한 뒤에 캐롤린의 집을 빠져나왔다고 진술했다. 샌드라가 거짓말 탐지기에서 흉기에 대해서 거짓 반응을 보였던 것은 사건 현장에 있던 캐롤린을 살해한 흉기를 직접 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샌드라는 자신의 진술 중 일부를 번복했다. 번복한 진술은 자신이 캐롤린을 확인 살해했다는 것. 샌드라는 전날에는 충격 때문에 자신이 확인 살해를 한 것처럼 진술했다면서 캐시와 한밤중에 캐롤린의 아파트에 간 것은 맞지만 확인 살해는 캐시가 했으며, 자신은 집안을 어지럽히는 것만 도왔다고 진술했다. 결국 보트라이트와 한국 경찰은 다각도로 조사를 한 후 샌드라가 캐롤린을 살해할 동기가 전혀 없다는 점을 인정해서 결국 번복된 샌드라의 진술을 바탕으로 그녀를 범인 은닉과 증거 인멸 혐의로 체포 후 같은 죄목으로 기소했다. 한국 사법부는 샌드라에 대한 공소를 인정하고 그녀에게 1년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이후 그녀는 선고된 형량인 1년도 다 채우지 않고 모범수라는 명목으로 잔여형기를 6개월여를 사면받아 석방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캐롤린의 유족들은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한국 경찰은 캐시가 캐롤린에게 사랑고백을 하다 거절당하자 분노에 휩싸여 캐롤린을 살해했다는 결론을 토대로 유력한 용의자가 된 캐시에게 한국으로 들어와 조사와 재판을 받을 것을 요청했지만 캐시는 한국행을 끝내 거부했다. 그녀가 한국행을 거부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한국과 미국사이에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덕을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우방국인 한국은 미국과는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고 있지 않던 상태였다. 필요성이 제기되어 양국 간에 협상이 시작된 건 캐롤린이 살해되기 불과 1년 전인 1987년이었다. 그리고 양 국 사이에 무려 12년 동안 협상이 진행된 끝에 1999년에 가서야 타결을 보게 되어 범죄인 인도조약이 양국 국회에서 비준을 받게 되었다. 당연히 한국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인 캐시를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됐다고 쳐도 아서 패터슨처럼 범죄자라는 게 명백하게 증명된 것도 아니고 그냥 용의자 수준인지라 승인됐을 가능성도 낮다,
그나마 그녀를 살인죄로 기소해서 미국에서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였지만 그마저도 그 당시에는 불가능했다. 미국인이 해외에서 같은 미국인에게 살해되는 일이 생겨도 이를 미국에서 재판할 수가 없는 체제였던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해당국가에서 형이 확정되면 확정된 형을 상호협상을 통해 송환하여 미국에서 형을 살게 하는 정도였던 것. 그야말로 법과 제도의 허점 덕에 캐시는 어떤 기소나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살게 되었다.
캐롤린 가족들은 지속적으로 캐시의 기소와 처벌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해외에서 미국인이 같은 미국인을 살해하는 등의   범죄행위를 미국에서 재판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안 입법에 힘써서 결국 클린턴 행정부 때 이 법이 통과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법률이 소급적용이 안 되는 고로 정작 캐시를 처벌할수는 없었다. 캐시는 워싱턴주 경찰을 통해 한국 경찰에 자신은 캐롤린을 죽이지 않았다는 내용의 진술을 한 뒤 그 어떤 수사기관의 조사도 받지 았았다. 그 대신 검찰에서 산드라를 통해 캐시의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 조차도 불발되었다.
결국 미국에서는 공소시효가 없다지만 소급적용이 안되는 형편이다. 한국에서는 대구 양궁선수 살인사건처럼 태완이 법 적용이 안 되는 범죄라 해도 해외에서 도피생활을 하면 공소시효가 정지된 것으로 판단되어 국내로 송환하면 처벌받을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현지에서도 손을 놓는 형편이라 국내에 방문하지 않거나 송환되지 않으면 용의자를 처벌할 방법이 없다. 또한 당시 수사자료들은 이미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폐기 처분되어서 재판에 쓰일 증거자료 또한 부실한 상황이다.
2019년 3월 미국 CBS의 48 Hours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CBS의 추적결과 캐시는 보도 당시 기준으로 워싱턴주에 위치한 웨스턴 워싱턴 대학 (WWU)에서 직원으로 18년째 근무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학 측은 48 Hours의 보도 이후 그녀가 교직원으로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2.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

  1990년 1월 4일 새벽 1시 30분께 부산 사하구 신평동 인근에서 한 남녀가 차를 주차해 놓은 후 여성은 차에서 내리고 남성은 뒷좌석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괴한 2명이 강제로 차 문을 열고 피해 남성의 얼굴을 돌로 계속 가격하였다. 그때 여성이 돌아오고 괴한은 "남성을 살리려면 차에 타라"라고 말했다. 차는 엄궁동으로 향했고, 괴한들은 피해 남성의 손을 뒤로 묶고 입을 막은 후 피해 남성을 죽이기 위해 낙동강에 밀어 넣었다. 피해 남성은 겨우 테이프를 풀고 물속에서 나와 괴한과 격투를 벌이다가 괴한이 방심한 사이 여성에게 도망치라는 소리를 지른 후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도망쳐 근처 공장에 숨어있다가 공장 직원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 후 강변도로 앞 낙동강변 엄궁동 555번지 갈대숲에서 피해 여성의 시신이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는데, 두개골이 분쇄골절 되었으며 뇌 일부를 도구 없이 맨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손상된 상태였다. 피해 여성은 인근 지역에 살던 박 씨로, 박 씨는 사건 바로 전 날까지 한 무역회사에서 근무했다. 현장에서는 박 씨의 시신 외에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그 어떤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박 씨의 직장동료는 밤이 어두워 범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피해자이자 목격자인 남성이 기억하는 유일한 사실은 범인 중 한 명은 키가 컸고 다른 한 명은 키가 작았다는 정도였다. 범인의 특징은 그 시기 낙동강변에서 잇따라 발생한 여러 건의 강도상해 사건들의 범인들과 매우 흡사했다. 사람들은 일련의 사건을 가리켜 일명 '엄궁동 2인조 사건'이라 불렀다. 엄궁동 2인조는 현장마다 지문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고 수사는 지체됐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서 30여 m 떨어진 부분에서 체액이 묻은 손수건이 발견되었는데, 초기 검사 혈액형은 A형이었으나 재검사 후 AB형로 밝혀졌고, 2인조 혈액형은 각각 AB형, O형이었다. 피해자 남성 차량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으로 확인한 결과, 피해자들의 혈액형은 남성 A형, 여성 B형이었다.
그런데 사건 발생 2년 후 용의자들이 검거됐다. 당시 경찰 발표에 따르면, 체포된 두 사람은 낙동강 주변에서 경찰을 사칭하며 돈을 갈취하고 다녔던 전력이 있었다. 당시 을숙도는 차량 통제 지역이었으나, 연인들이 은밀한 데이트를 위해 차를 몰고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고, 이들을 대상으로 경찰인 척 위협하다가, 봐줄 테니 돈을 달라 하여 돈을 받고 내보내는 형식이었다. 게다가 한 명은 키가 컸고 다른 한 명은 키가 작았다. 당사자 최 씨 말로는 당시 청년봉사단원이었고 자연보호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을숙도에서 차를 끌고 온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했더니 30,000원을 자신에게 주었고, 얼떨결에 그 돈을 받았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한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이들이 범인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10여 차례가 넘는 조사 과정에서 이들은 진술을 끊임없이 번복했다. 그리고 특정 시점부터 두 사람의 진술이 정리된 정황이 발견됐다. 최종 수사 결과 검거된 두 사람 중 체격이 큰 최 씨가 각목으로 피해자를 구타한 후 키가 작은 장 씨가 돌을 이용해 살해한 것으로 정리됐다. 두 사람은 살인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로부터 21년 후 두 사람은 감형을 받고 출소했다. 하지만 이들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당시 두 사람의 변호를 맡았던 문재인 변호사는 장 씨가 강력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장 씨의 시력이 장애에 가까울 정도로 나빴다는 사실은 최 씨도 알고 있었다. 시력판의 가장 윗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시력이었다. 그럼에도 최 씨는 당시 장 씨를 공범으로 지목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최 씨가 형사들로부터 혐의를 인정하면 가혹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속임수, 일명 '공사'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현재는 과학수사가 발달하여 DNA 검사나 CCTV 확인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범인을 검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과학수사라는 개념이 생소했다. 그래서 용의 선상에 올라와있는 용의자로부터 자백을 받는 것이 강력한 증거였는데, 자백을 받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강압수사가 종종 일어났다. 박준영 변호사가 그 당시 사관 관련 신문기사 3년 치를 찾아보니 고문과 가혹행위와 관련된 기사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 기사들 중 엄궁동 피해자들이 수사를 받았던 부산사하경찰서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거의 비슷한 고문을 당했다는 기사도 발견했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살인사건과 같은 강력사건, 미제사건의 범인을 검거한 경찰에게 특진을 시켜주는 제도가 있었고, 특진에 눈이 먼 경찰이 증거를 조작해 억울한 희생자를 만든 안타까운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3.유명 공인회계사 피살사건

 1990년 11월 4일, 반포대교 남단 150m 지점에서낚시를 하던 낚시꾼 문 모씨(31)가 한강 위에 떠내려가던 가로 1m, 세로 70㎝ 크기 여행 가방을 건져 올렸다.
아무 생각 없이 가방을 열어보던 낚시꾼은 잠시 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 여행가방 안에는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웅크린 채 죽어 있었다. 부패는 거의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경찰이 얼굴에 씌워진 비닐봉지를 벗겨보니 남자의 안면부 곳곳에 외상이 있었다. 남자의 오른쪽 눈 부위에는 멍이 심하게 들어 있었으며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흉기에 맞은 듯 뒷머리가 2㎝가량 찢어져 있었다. 시체 상태만 봐도 타살임이 확실했다. 확인 결과 변사체의 주인은 TV에 고정출연하고 3번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등 명예와 부를 겸비한 상류층 인사였던 임길수 씨였다. 임 씨의 부인(당시 43세)의 진술에 따르면, 남편이 지난달 28일 친구를 만나겠다며 집을 나간 뒤 소식이 끊어졌으며, 29일 KBS 측이 그동안 출연해 오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의 녹화에 이유 없이 출연하지 않았다는 전화를 걸어와 서울서초경찰서에 가출신고를 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완벽을 기했던 임 씨의 성격상 '잠적'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임 씨는 모습을 감춘 지 6일 만에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되고 말았다.
부검결과 임 씨의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임 씨의 머리에 난 상처는 몽둥이나 벽돌 등 둔탁한 둔기로 맞은 것이 분명했다. 사망  납치 폭행 등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사체의 부패 진행상태 및 위 안의 음식물 소화 정도로 보아, 임 씨는 사망한 지 이미 5~6일 정도 지난 것으로 추정됐다.
또한 수사팀은 임 씨에게서 폭행 상처 외에는 이렇다 할 반항흔이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면식범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임 씨가 얼굴이 비교적 잘 알려진 공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 수사팀은 범행 목격자를 찾는 데 주력했다. 사체를 가방에 담아 한강에 유기한 대담한 범행수법으로 볼 때 분명 목격자가 있을 법했다.
충청남도 공주시 출신인 임씨는 국제대 세무학과를 졸업하고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뒤 23년 동안 서울 강남 일대에서 공인회계사로 활동해 왔다. 임 씨는세무사 자격도 갖고 있으나 세무사회에는 등록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임 씨는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때 자신의 고향인 충남 공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1대 때는 서울 강남에서, 13대 총선 때엔 서울 서초구 갑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역시 낙선했으며, 그동안 KBS 등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세무관계 전문가로 출연했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화려한 사회생활과 달리 임 씨는 복잡한 여자관계와 금전문제로 갈등이 많았던 것으로 밝혀져 피살 동기와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였다. 임씨는 14년 전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고, 내연의 관계인 김 모 씨(당시 40세)와 동거하며 1남 3녀를 낳고, 추가로 적어도 10여 명 이상의 여자들과 관계를 맺어온 것 등등 복잡한 여자관계를 가져왔던 것으로 경찰조사 결과 밝혀졌다. 부인 강 씨는서울대 출신으로 K여고 교사로 재직하던 중 임 씨를 만나 결혼했으나, 최근 관계가 악화돼 임 씨의 어머니와 동생 등은 모두 옥수동에서 동거 중인 여자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임 씨는공인회계사로 10여 개의 대기업과 거래를 해 상당한 돈을 모았으나 잇따른 총선 출마와 여자관계 등으로 탕진하는 바람에 재산은 1억 5,000만 원 정도에 불과해 살고 있던 서초동 삼풍아파트도 8,500만 원에 전세 들어 살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임 씨는 자신의 사무장으로 근무하던 친동생이 수익금을 빼돌리다 들키자 즉시 해고한 뒤 퇴직금도 주지 않는 등, 주변 친인척들에게는 냉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임씨는 로열살롱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등 외형상으로는 화려한 생활을 해왔으나, 돈에 쪼들리게 되자 세무관계 일을 맡을 때도 일반적인 관행인 후불이 아닌 선금을 요구할 정도였다. 경찰은 발견 당시 임 씨의 옷차림이 정장인데 비해 신발이 벗겨진 점으로 미루어, 실내에서 흉기로 뒷머리를 맞아 살해당한 뒤 승용차에 의해 옮겨졌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임씨의 체격이 왜소하지만 유기되는 과정까지 적어도 1명 이상의 남자가 낀 복수범인에 의한 범해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았다. 또한 임씨의 주변인물 모두 일정한 정도이상의 원한관계를 품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부인 강 씨와 내연 관계인 김 씨는 최근 이혼 문제로 서로 만나 심하게 다투었으며, 임 씨와 관계를 맺었던 다른 여자들도 그동안 공개적으로 임 씨를 협박해 돈을 뜯어가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 중 경찰이 가장 먼저 용의 선상에 올린 사람은, 운전기사 강모 씨(당사 35세)와 자취를 감춘 비서 조모 씨(당시 24세)였다. 10년 가까이 임 씨의 승용차를 운전해 왔던 강 씨는 임 씨의 스케줄 등을 자세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수사팀은 그를 조사하면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미 강 씨는 결혼해 사건 당시 강원도로 신혼여행 중이었으며, 강씨 또한 "결혼을 앞두고 임 씨에게 자금지원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했다. 잠시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나는 이번 사건과 무관하고 아는 바도 없다"라고 진술했다. 그리고 조사결과 강 씨는 모든 알리바이가 확실했으며 특별한 혐의점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강 씨를 조사하고도 아무 소득을 얻지 못한 수사팀은 이후 수사방향을 크게 3가지로 잡았다. 첫 번째는 업무 때문에 피살됐을 가능성이었다. 수사팀이 주목한 것은 임 씨가 회계·세무 관련 업무를 담당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조사결과 임 씨와 계약을 맺은 기업들은 당시 대기업을 포함해 100여 곳에 달했다. 수사팀은 임 씨가 업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고객의 비밀에 대해 상세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업무상 원한 등으로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또 임 씨가 상당한 규모의 금전거래를 해왔던 점에서 채권·채무관계를 둘러싼 청부살인 가능성도 제기됐다. 이에 수사팀은 임 씨가 운영하던 사무실에서 기업체 회계자료와 각종 서류 등을 압수해 분석하는 등 다각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2번째는 원한살인일 가능성이었다. 임 씨는 여러 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고향과 지역사회에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해오고 있었는데, 마당발 인맥 등을 기반으로 국회의원 선거에도 3번이나 출마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폭넓은 인맥과는 달리 평판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임 씨가 평소 일부 사람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진술을 확보한 수사팀은 원한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도 열어놓고 수사를 진행했다.
마지막은 치정살인이었다. 임 씨의 주변 인물들과 심층적인 접촉을 시도한 수사팀이 눈여겨본 것은 임 씨의 복잡한 여자관계였다. 임 씨의 사생활은 상당히 복잡했다. 임 씨는 부인 강 씨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으나 사건 발생 10여 년 전부터 또 다른 내연녀와 동거하며 4남매를 낳았다. 당연히 임 씨와 본부인의 사이가 좋을 리 만무했다. 조사결과 부인은 국세청에 남편의 탈세사실까지 고발할 정도로 부부관계가 악화된 상태였다. 특히 이들 부부는 최근에 더욱 사이가 나빠져 이혼 얘기까지 거론되기도 했고 불화 끝에 결국 임 씨는 노모와 함께 내연녀의 집에서 생활해 왔으며, 부인에게는 간혹 들르곤 했다.
하지만 수사팀이 더욱 주목한 점은 임 씨가 내연녀 외의 다른 여성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본 부인을 포함한 임 씨의 여인들이 일제히 용의 선상에 올랐다. 하지만 이들은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주변인들의 진술과 제보만으로 상대를 불러 조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뿐더러, 내연관계라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이후 수사팀은 범행이 벌어진 1차 장소를 찾는 데 수사력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수사팀은 임 씨의 양복에 흙이 묻어 있었고 임 씨가 들어있던 가방이 심하게 땅에 끌린 흔적이 있는 점 등을 근거로 추적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다행히 25일 임 씨의 승용차가 강남의 한 종합병원 주차장에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승용차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문이 잠겨 있었는데 차 안 바닥에는 모래와 흙이 묻어 있었다. 주차장 경비원은 "1주일 전부터 문제의 차량이 한 곳에 계속 주차돼 있어 신고했다"라고 진술했다. 수사팀은 차량에서 채취한 지문 2개와 머리카락 다섯 올에 대한 정밀감정을 국과수에 의뢰하고 차량 내부에 묻어있는 과 모래의 출처에 대해서 조사했다. 이에 수사는 모처럼 활기를 띠었지만 감정 결과 범인을 특징할 수 있는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이듬해 4월 수사팀의 용의 선상에 오른 인물은 간통사건으로 구속된 구 씨(당시 40세)와 그녀의 내연남(당시 33세)이었다. 구 씨를 구속할 당시 그의 소지품에서 살해된 임 씨가 생전에 써준 한 건의 영수증이 발견돼 조사를 받았다.
조사결과 구 씨는 1년 전인 1989년 초 세금상담 관계로 임 씨와 알게 된 후 가깝게 지내온 것으로 드러났다. 구 씨는 양도소득세 업무 대행 수수료 명목으로 500만 원을 임 씨에게 건넸으나 임 씨가 일을 해결하지 못하자 돈을 돌려줄 것을 독촉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수사팀은 구 씨가 여러 번 이혼한 전력이 있고 전 남편들로부터 거액의 위자료를 받아내는 등 재물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는 점, 임 씨의 사체가 발견된 직후 구 씨 내연남의 눈 밑에 상처가 있었다는 점, 그 무렵 그가 임 씨의 차와 같은 종류의 차량을 타고 다니는 것을 봤다는 주변인의 진술 등을 토대로 임 씨 사건과의 연관성에 대해 조사했다. 하지만 임 씨 사건과 관련된 특이점은 나오지 않았다.
그해 6월 수사팀은 또 다른 용의자에 주목하게 된다. 1991년 6월경 서초경찰서는 A 공업사에 근무하다가 퇴직한 60대 남성을 A 공업사 직원들이 집단폭행한 사건을 수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사과정에서 경찰은 A 공업 대표를 맡고 있던 이 씨(당시 40세)가 피살된 임 씨와 내연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조사결과 이 씨는 임 씨와 임대관리 업무로 인해 안면을 튼 후 가까워졌는데 평소 사업문제로 종종 갈등을 빚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이 씨는 지난해 10월 임 씨가 업무처리 비용을 요구하자 '내연관계를 폭로하겠다'며 7,000만 원을 요구해 심하게 다퉜던 것으로 확인됐다.
수사팀은 이 씨가 자신의 이해관계와 어긋나거나 사업에 방해가 되는 인물에 대해 폭력배를 동원해 청부폭력을 행사한 사실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임 씨 사건의 용의자로 수사선상에 올리고 조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수차례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이 씨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으며, 수사팀 역시 그녀에게서 특이한 사항을 찾아내지 못했다.
게다가 이 사건은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지 1달도 안 되어 벌어진 살인 사건이며 결국 영구 미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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